600년의 시차, 같은 여정을 밟아간 두 여행가
여기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주말여행이나 며칠간의 여행, 아니 수개월도 아닌 무려 34년이라는 기간에 걸친 흥미진진한 대장정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전설의 기사' 존 맨드빌 경(Sir John Mandeville)이 1322년 성지순례를 위해 영국을 출발한 후 1356년 세월과 여행에 육신이 지치고 쇠약해진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 집필한 ‘여행기(The Travels)'가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성지(聖地)와 더불어 인도, 중국, 티베트는 물론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바쳤으며, 그 여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존 맨드빌의 이 ‘여행기'는 집필된 지 600년 후 파리 센 강변의 한 고서점에서 주말여행차 파리를 찾은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가일스 밀턴(Giles Milton)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기독교 성지로, 미지의 동방으로
밀턴은 이 책을 읽고 맨드빌 경의 발자취를 따라 2년여 동안 ‘여행기'를 둘러싼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 터키, 그리스, 시나이 사막, 시리아를 직접 여행하면서 진실을 밝혀낸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기사(The Riddle And The Knight)'를 쓰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중세의 기사가 여행한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여행하며 보고 느끼는 작가의 또 다른 모험담(여행기)이라 할 수 있다.
한때 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던 영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내 목숨을 잃은 올번스라는 한 병사를 추앙하기 위해 장엄한 세인트 올번스(Saint Albans) 수도원이 지어졌고, 그 후 거룩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그 수도원 내 묘지에 묻히게 된다. 저자는 그곳에서 이제는 글씨마저 닳아 희미해진 한 묘비의 판석 위에서 존 맨드빌 경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곳 세인트 올번스에서 맨드빌과 밀턴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처음 목적지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이곳은 키프로스와 시리아, 예루살렘뿐 아니라 시나이 반도 사막에 있는 성 캐서린 수도원까지 찾아가기 위한 첫 관문이다.
때는 시월, 맨드빌이 첫 발을 디딘 이스탄불에 벌써 겨울의 한파가 느껴질 즈음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름다운 섬 헤이벨리아디(Heybeliadi, 일명 Princess Islands)에 위치한 삼위일체 수도원은 천년 고도의 영화를 누리던 풍요로움과 함께 지금도 변함없는 도시와 바다의 매력을 전해준다.
성지 예루살렘과 시나이 사막의 요새에 위치한 성 캐서린 수도원은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온갖 고난과 죽음까지 무릅쓰고 수년에 걸친 순례여행에 나선 그 순수한 열정과 신앙심을 일깨우게 한다.
선구적 탐험가이자 문학가
한때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였으며 로마제국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시리아가, 또 수도 다마스쿠스가 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지는 우마이야 사원의 웅장함과 예술적 아름다움이 대변해주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 가운데 하나인 세례 요한의 머리가 안치돼 있다는 이 사원의 아름다움에 중세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넋을 잃을 정도였고, 예언자 마호메트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을 것 같아서 방문을 주저할 정도였다.
인도와 중국을 거쳐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을 향해 가는 맨드빌의 ‘여행기' 후반부부터는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더 무시무시한 창조물들을 만난다. 개처럼 생긴 머리를 가진 여인, 머리가 둘인 거위, 거대한 달팽이를 비롯해 심지어는 고환이 엄청나게 커 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자들, 식인종 등등.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로 인해 의문을 품게 된다. 과연 이 늙는 방랑자는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정말로 극동 지방까지 갔던 것일까?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 책은 전체가 허구란 말인가?
맨드빌에게서 진지한 탐험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자신의 진기한 여행담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허풍쟁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가 사망한 후 후대 학자들은 그의 ‘여행기'에 의심을 품게 되고 맨드빌은 자신이 여행한 적도 없는 곳의 이야기를 꾸며낸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여행기'는 르네상스 초기였던 1350년에서 1800년에 걸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세계를 향한 열망과 함께 먼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갈구하던 왕들과 성직자들은 물론 중세의 모든 탐험가들은 이 책을 탐독했고, 지리학자들은 그가 발견한 새로운 정보를 토대로 지도를 다시 그리기 바빴다.
사실 ‘여행기'는 맨드빌 자신이 직접 항해에 나섰는가 아닌가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신대륙을 찾아 그곳의 온갖 보물을 가져다 주겠다는 콜럼버스의 말에도 지원을 주저하던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 이런 국왕 부부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 어떤 보석이나 지도가 아닌, 그 한 권의 책이었다. 탐험가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출발할 수 있는 모험정신과 아울러 이론과 실제에서의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영문학 작가로서도 명성을 남겼다. 셰익스피어, 존 밀턴, 조나단 스위프트, 사무엘 존슨 모두 그의 글에 영향을 받아 19세기까지 영국 산문(散文)의 아버지로 일컬어진 사람은 초서가 아닌 존 맨드빌이었다.
둥근 세계는 신의 섭리
‘여행기'의 또 다른 중요성은 당시 유럽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종교관, 지구는 네모나다는 세계관을 반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으나 순수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구약성서의 욥과 같은 부류의 이교도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섭리가 온 세상에 고루 다 적용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였고 세계 어느 곳으로든 여행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건강하고 좋은 동반자와 배만 있다면….
가일스 밀턴은 ‘수수께끼의 기사'를 통해 역사 속에 묻히고 왜곡된 맨드빌의 실체를 찾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맨드빌이 주장하듯 여행이란 단지 건강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니 마음의 여유밖에 없다 해도 이 가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명작 속의 여행을 경험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일스 밀턴이 존 맨드빌의 자취를 따라 나섰듯이….
........................ koreanair.co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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